경기도의 수부도시 수원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를 향한 효심과 웅대한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운 계획 신도시다. 정조 18년(1794년)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성(華城)을 쌓기 시작해 2년 10개월 만에 완공했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축조된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원은 우리나라 농업과학기술의 총 본산인 농촌진흥청과 각종 연구소 등이 있으며, 선경그룹의 태동지이고, 삼성전자가 있는 경제도시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택지개발공사가 시작해 영통신도시가 들어서는 등 시세를 확장했다.
정조대왕이 세운 계획도시
수원시내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은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5.7㎞에 걸쳐 펼쳐져 있는 화성은 사통팔달로 통한다. 정조 13년,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뒤주 속에서 죽음을 당하자 즉위 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유해를 산세가 빼어난 새로운 명당인 화산(현 화성시 안녕동) 현륭원(융릉)으로 옮겼다. 이어 화산 아래에 있던 주민과 관가를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주시킨 뒤 신읍치의 안정과 고을로서의 체모를 높이기 위해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축성공사를 시작해 완공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길이 5744m에 면적은 130㏊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다. 화성은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시설물은 41개소이고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이 소멸됐다. 화성은 성문, 누대 등 건축 양식이 동양성곽의 웅대함과 서양성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갖춰 성곽 시설물이 미려하다. 또 당시 화기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축성된 성곽이다.
200년 지나도록 성곽 원형 그대로 보존돼
수원역에서 걸어서 20분, 승용차로 10분이면 경기도청 옆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의 첫 관문 화성장대에 오른다. 일명 서장대라고 불리는 화성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지휘본부로서,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총지휘하던 곳이다.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하는 능행차 시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증층 누각이며 관광객들을 위해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실학사상의 대가 정약용이 설계한 화서문을 만나게 된다. 보물 403호인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으로 좌우로 성벽에 연결되는 홍예문 위에 단층으로 문루를 세웠다. 전면에는 반원형 석축으로 두른 건축의 옹성이 있다. 화서문 옆에는 공격하는 적들을 삼면에서 저격할 수 있도록 지은 서북공심돈이 자리하고 있다.
장안공원을 지나면 화성의 북문 장안문을 만난다. 장안문은 문루의 높이가 13.5m, 너비가 9m로서 성 중앙에 문을 내 남문인 팔달문과 마주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해 웅대함을 자랑한다. 이어 북쪽 수문인 화홍문이 인접해 있다. 화홍문은 7칸의 홍예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문루를 세웠다. 화홍문 옆에 있는 동북각루(일명 방화수류정)은 성의 동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요지로 적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저지하는 시설이다. 언덕 위에 정자가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못은 용지라고 하며, 경치가 아름다워 조상들은 용지에 비친 달을 감상하는 낭만을 수원팔경의 하나로 선정했다.
성곽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화홍문을 지나면 당시 군사들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너른 구릉의 동장대(일명 연무대)가 나타난다.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직접 활을 쏘기도 했으며, 현재는 관광객들이 국궁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이어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만난다. 창룡문은 내외 이중의 무지개문으로 구축됐으며, 한국전쟁 때 문루가 소실되고 문의 기틀인 홍예까지 크게 파손되었으나 1976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어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동남각루에서 성곽이 끊어지고 재래시장인 지동시장이 나타난다. 동남각루에서 팔달문 사이는 한국전쟁 때 파괴돼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재래시장을 나오면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나타난다. 보물 402호인 팔달문은 석축의 홍예문 위에 여장을 돌리고 2층 건물로 축조한 반월형 성으로 우리나라 성문 건축에서 볼 수 없는 형식을 갖췄다.
정조의 효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임시궁궐 ‘화성행궁’
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화성이 축성될 당시에 함께 건축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임금님의 능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로 모두 657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여 있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례에 걸친 능행을 거행했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회갑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청으로도 활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의해 신풍초등학교 내에 낙남헌만 남긴 채 모두 파괴되고 봉수당 자리엔 자혜의원(후 경기도립 수원병원)이, 북군영에는 경찰서가, 남군영에는 토목관구가 들어섰다. 이에 수원시민들이 나서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 경기도립 수원병원과 경찰서를 옮기고 주요건물 482칸을 복원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세계인이 반한 뼈대있는 맛 ‘수원갈비’
수원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원갈비’다. 갈비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음식이다. 수원갈비는 갈비구이의 원조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원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일등 한우에 천연양념, 참숯불로 대표되는 수원갈비는 담백한 맛이 특징이며, 갈비 인심이 후한 것도 자랑거리다. 수원 최초의 갈비 음식점은 1940년 화성 문밖 장터인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에 문을 연 ‘미전옥’이다. 미전옥으로 출발한 고 이귀성씨의 ‘화춘옥’은 수원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미식가들에게 갈비구이의 명소로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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